:::영남뉴스 (ynnews).

수필/Wit

ㆍ작성일	2021-08-16 21:30

ㆍ추천: 0 ㆍ조회: 449

천목거사의 《20년 만에 피는 능소화》
고수에게서 배운다(1). 강민구 서울고등법원 부장판사
(천목거사 송종의 씀)

오늘은 광복절이다. 내가 이글을 며칠 전부터 쓰려하였으나 금년은 워낙 무더운 날이 이어져 늦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바람에 몇 줄씩 메모를 함에 그치고 글을 이어가지 못한 채 며칠을 보냈다. 엊그제부터 아침저녁으로 선선한 바람이 불어와 늦더위도 한물 간 느낌인데다가 오늘은 휴일이어서 주변도 조용하므로 마음을 가다듬고 이 글을 쓴다.

조금 전 사무실에 올라오기에 앞서 마당에 피어난 능소화를 자세히 살펴보고 왔다. 책상머리에 앉기 전에도 사무실 남서쪽 창문을 통해 그 꽃을 먼발치에서 다시 쳐다보았다. 이 글의 주인공이 바로 그 능소화이기 때문이다.

능소화가 어떤 꽃인지 잘 아는 사람도 있겠지만 이 꽃은 별로 흔치 않아서 오히려 잘 모르는 사람이 더 많을 것이므로 먼저 인터넷을 검색하여 능소화가 어떤 꽃인지 대강의 설명을 해두려 한다.

요즘은 참 희한한 세상이다. 인터넷이 없었던 시절에 내가 지금 쓰는 내용을 알아내 글로 표현하려면 여러 가지 책을 찾아보아야 할 뿐만 아니라 능소화를 길러온 사람들의 말도 들어보아야 했을 것이다. 그런데 인터넷이란 선생님은 싫은 내색도 전혀 없이 내가 궁금하게 여기는 모든 것을 신속하고도 정확하게 알려준다. 이 선생님은 과연 귀신 뜸떠먹을 만한 신묘한 재주를 지닌 현대판 도깨비가 분명하다 할 것이다.

인터넷이란 도깨비가 내게 무엇을 가르쳐주었는지 알아보자.

능소화란 ‘한자어로 업신여길 능(淩), 하늘 소(宵), 꽃 화(花) 자를 써서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올라가는 꽃이라는 뜻이다. 학명은 Campsis grandiflora이고, 속씨식물 문, 쌍떡잎식물 강, 통화식물 목, 능소화 과의 낙엽성 덩굴식물이다. 원산지인 중국에서는 금등화(金藤花)로 통용되고, 영어로는 Chinese trumpet creeper 라고 표기한다. 옛날에는 능소화를 양반집 마당에만 심을 수 있었다는 이야기도 있어서 우리나라에서는 민가에서 양반 꽃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나무의 모양을 보면, 가지에 흡착 근이 있어서 벽, 바위, 나무 등 의지할 수 있는 물건에 흡착근을 붙여 올라가고 길이가 10미터를 넘겨 20미터 정도 까지 올라가는 경우도 흔하다. 잎은 마주나고 홀수 1회 깃꼴겹잎이다. 작은 잎은 7∼9개로 달걀 모양 또는 달걀 모양의 바소 꼴이고, 길이가 3∼6cm이며 끝이 점차 뾰족해지고 가장자리에는 톱니와 더불어 털이 있다. 덩굴성 목본 식물로 지네발처럼 생긴 흡착 뿌리가 있어서 벽면을 잘 타고 올라가는데, 담쟁이와는 좀 다르게 부채 살처럼 아주 자연스럽게 줄기를 뻗어 나가며 오래 묵은 줄기는 회갈색을 띠는데 고목처럼 기품이 있어서 보기도 좋다.

꽃은 8~9월경에 피고, 가지 끝에 원추꽃이 차례를 이루며 5∼15개가 달린다. 꽃의 지름은 6∼8cm이고, 꽃의 바깥 색은 귤색인데, 안쪽은 이보다 짙은 주황색이다. 꽃받침은 길이가 3cm이고, 꽃잎은 5개로 갈라지며, 갈라진 조각은 바소 모양이고 끝이 뾰족하다. 화관은 깔때기와 비슷한 종 모양이다. 수술은 4개 중 2개가 길고, 암술은 1개이다. 열매는 삭과로서 네모지며, 2개로 갈라지고 10월에 익는다.

꽃이 크고 아름다워서 금등화(金藤花)란 이름이 붙은듯하고, 꽃모양이 트럼펫 같아서 서양에서는 트럼펫 클리퍼라는 이름이 생긴 듯하다. 한여름의 초록은 진녹색인데 반하여 능소화의 나뭇잎은 연녹색으로 커다란 꽃이 가지 끝에 돋아난 꽃대에 주렁주렁 매달려 있는 모습은 잠시 더위 속의 눈을 식혀주기에 손색이 없다.

중부 지방 이남의 사찰에 많이 심어 왔으며 요즈음은 민가에서 관상용으로도 심는다. 높이 자랄 뿐만 아니라 잎과 꽃이 선명해서 멀리서도 충분히 감상할 수 있기 때문에 누가 심었든 그 사람의 것이 아니라 보는 사람 모두의 나무가 할 것이다. 조선시대에는 이 꽃을 매우 귀하게 여겨 능소화를 구중궁궐의 꽃 또는 양반꽃이라 불렀으며 실제로 양반들이 키웠다는 자료도 있다.

19세기의 사학자이면서 언론인이었던 호암 문일평은 1930년대 펴낸 화하만필(花下漫筆)에서 '서울에 이상한 식물이 있는데 나무는 백송(白松)이요, 꽃은 능소화[凌花]다. 능소화는 중국이 원산으로 수백 년 전 연경에 갔던 사신이 들여왔다. 오늘날 선조의 아버지 덕흥군의 사당이 있는 사직동 도장궁에 유일하게 있다'라고 썼다.

고 박경리 선생은 소설 '토지'에서 '미색인가 하면 연분홍빛으로도 보이는' 능소화를 최 참판 댁의 상징으로 종종 등장시키기도 했다. "환이 눈앞에 별안간 능소화 꽃이 떠오른다. 능소화가 피어 있는 최 참판 댁 담장이 떠오른다." 라는 표현이 그것이다.

도장궁이란 궁궐에 유일하게 피어있었다니 정말 흔한 꽃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조선시대에는 일반 민가에서 키우다가 발각되면 꽃은 뽑아버리고 사람은 관가로 끌려가 곤장을 맞았다는 말도 있다. 그 진위 여부는 알 수 없으나 만약 사실이라면 땅으로부터 기운을 얻고 하늘의 보살핌을 받으며 자란 꽃을 오로지 가진 자 들만의 것으로 하고 싶었던 생각으로 저지른 웃지 못 할 코미디라 할 것이다.

이렇게 귀한 대접을 받던 능소화가 얼마 전에는 그 꽃가루에 독성이 있는 것으로 잘못 알려져 온갖 푸대접을 받아 하마터면 사라질 뻔 했다. 결론적으로 이는 잘못된 정보인 것으로 판명되었다. 꽃가루가 특별한 독성이 있는 것이 아니고 다른 꽃가루처럼 눈에 들어가면 좋을 게 없을 정도라고 한다. 꽃가루 모양이 갈고리 모양이라서 각막이 손상될 수 있다고 걱정하는 사람도 있지만 사실은 아주 미세한 크기라서 눈에 상처를 낼만한 것은 아니라 한다.

충매화인 능소화는 우중충한 마을을 환하게 밝혀주면서 벌과 나비를 끌어 모으니 고마운 꽃이다. 꽃피는 시기와 장마가 시작되는 시기가 비슷하다고 해서 장마를 알리는 꽃이란 별명도 가지고 있다. 옛날 궁궐에 복사꽃빛 고운 뺨에 자태도 아리따운 소화라는 어여쁜 궁녀가 임금님을 사모하면서 매일 담장 너머를 서성이다 그만 쓰러져 죽었다는 전설도 있다. 이런 것들이 내가 인터넷을 검색하여 알아낸 내용이다.

우리 집에 핀 능소화는 그 꽃나무를 심은 지 정확히 20년 만에 핀 꽃이다. 이제 그 사연을 적어보자.

내 사무실이 있는 이 건물은 2001년에 건립되었다. 그 이듬해에 이 건물과 천고재 사이의 정원 끝부분에 파고라 한 개를 세운 적이 있었다. 이 파고라에 등나무 순을 올려 그 그늘을 만들어 회사사람들에게 휴식처를 마련해주기 위해서였다.

파고라를 세운 후 기둥 주변에 등나무 두 주와 능소화 한 주를 심었는데, 이 등나무의 수세가 워낙 강건하여 불과 2~3년 뒤에 파고라를 뒤덮어버리니 함께 심은 능소화는 제대로 자라나지도 못했고 그 넝쿨 순을 등나무 위로 올려줘 보아도 제 구실을 못한 채 꽃 피울 엄두를 내지 못했다. 그렇게 지내기 몇 년 뒤 그 파고라가 철거되고 그 자리에 팔각정인 가한정이 세워졌으므로 등나무 두 주는 모두 제거되었고 이 능소화 줄기도 함께 잘려 나갔다.

능소화가 심어졌던 자리는 팔각정 정면의 한 구석이었으므로 그 자리에 조경 삼아 개울가에 굴러다니던 높이 약 1.5미터 정도의 현무암 돌을 새워놓았다. 그러므로 능소화의 뿌리는 그 바윗돌 아래 파묻히게 되었다. 그때가 아마도 2009년쯤이었을 것이니 그렇게 된지도 이미 10년이 지났다.

파고라가 철거된 이후에도 봄이 되면 이곳저곳에서 등나무 싹이 얼굴을 내밀어 보이는 족족 이를 제거할 수밖에 없었음은 당연하고, 이 능소화의 새순도 같은 운명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지내다 보니 등나무 순은 모두 제거되어 한두 군데에 연약한 새순이 돋아남에 그치고, 이 능소화는 큰 바윗돌 밑에 뿌리가 파묻혀 역시 별로 눈에 뛰지 않은 채 한해 한해를 넘기고 있었다.

그런데 금년 봄 어느 날 팔각정 앞에 세워진 현무암 돌을 자세히 살펴보았더니 능소화의 두 줄기 싹이 돌 옆으로 돋아나 그 돌에 붙어 새 순이 올라가는 것을 보게 되었다. 위의 능소화 특성이 잘 발현되는 순간이었던 것이다. 그 새싹을 또 잘라버릴까 생각하다가 한번 내버려두자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매년 이 능소화의 새싹을 보는 족족 잘라버린 근본적인 이유는 잘못된 정보가 내게 입력되어 있었던 탓이기도 하다. 나는 어려서부터 눈이 나빠서 고등학교 시절에 이미 선천적 고도근시라는 판정을 받았던 사람이다. 언젠가 이 능소화의 꽃가루가 눈에 매우 해롭다는 말을 들어 기억하고 있었으므로 이를 키워 꽃 볼 생각을 접은 채 매년 돋아나오는 새싹을 잘라버렸던 것이다. 그러나 이런 정보는 내가 인터넷을 검색한 결과에서 보는 바와 같이 엉터리였던 것이다.

그릇된 정보가 사람의 판단에 미치는 폐해는 꽃가루가 사람에게 끼치는 해독에 비할 수 없음이 너무도 자명하다. 그나마 식물은 수명이 길어서 그릇된 정보가 시정되는 인연을 만나면 우리 집 능소화처럼 다시 회복할 기회가 찾아올 수도 있겠으나 한정된 수명을 지닌 사람이 이런 경우를 당한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경계할 일이 아닐 수 없다.

능소화는 그 생장속도가 생각보다 너무 빨라서 며칠 내버려두었더니 새싹 두 가닥이 1.5m정도의 높이인 그 현무암석의 꼭대기까지 이르는 것을 보게 되었다. 그 생명력에 감탄하여 그 싹 두 줄기를 제대로 키워보기로 결심했다. 20년생 능소화가 이제 시절인연을 만난 사연이 바로 이것이다.

싹을 틔어 새순이 돋아나기 시작된 지 보름이 못 되어 두 줄기로 기어오른 능소화의 새순은 이미 그 돌의 최 상부를 넘어서고 있었던 것이다. 이제는 그 덩굴이 더 기댈 곳조차 없게 되었다. 생각 끝에 이 넝쿨 순을 팔각정 지붕 밑까지 올리고 그곳으로부터는 팔각정 바깥쪽으로 유인하기로 했다. 회사직원을 시켜 팔각정 기둥과 내 집 천고재의 이층 베란다 난간 기둥사이에 길이 약 5미터의 와이어로프 두 줄을 메달아 팽팽히 설치하도록 지시하여 단단하게 이 로프를 매놓았으니 능소화의 두 줄기 넝쿨 순은 당연히 이 로프를 따라 길이를 늘려가기 시작했다.

이제부터 이 능소화는 자신의 생장을 배려해준 은혜를 신비스러운 생명력으로 보여주기 시작한다. 와이어 로프에 매달려 넝쿨 순을 키워가던 능소화의 두 줄기 싹은 매일매일 그 모습을 달리하며 키를 키워가면서 내달리기 시작했다. 오늘 자세히 살펴보면서 현무암 옆 땅바닥으로부터 지금 공중을 내달리는 줄기의 길이를 눈짐작으로 가늠해보니 약 6m정도 될 것 같다. 능소화는 하루에 10cm이상 씩 그 길이를 늘려가고 있었던 것이다.

8월 초의 어느 날, 길이를 늘려가는 능소화의 넝쿨 잎을 바라보다가 모양이 이상하게 생긴 잎이 좌우로 돋아나는 것을 보게 되었다. 자세히 살펴보니 이는 능소화 줄기에 쌍떡잎으로 달린 이파리가 아니라 그 잎 마디에서 돋아난 꽃의 줄기처럼 보였다. 내 업무수첩을 보니 8월 3일경 이 능소화 꽃줄기의 꽃 한 송이가 처음 개화하였으니 그 며칠쯤이었을 것이다. 이 꽃줄기가 늘어지면서 십여 개의 꽃 봉오리 모습이 완연히 나타나기 시작했다. 드디어 꽃 한 송이가 환하게 웃으며 그 신비한 자태를 세상에 드러낸 것이다.

한 여름인 8월에는 꽃이 별로 없어서 천고재의 넓은 정원에서도 꽃구경하기 어렵다. 이런 사정을 감안하여 정원에 목백일홍이라는 배롱나무 6주를 잔디밭 가장자리에 심었었다. 한여름에 꾸준히 피어나는 흰색, 자색, 연보라색 등 삼색의 꽃을 쳐다보는 재미로 더위를 식혀왔는데, 작년 겨울에 며칠간 혹한이 찾아와 그 나무의 큰 가지 대부분이 동사했다. 굵은 큰 가지 대부분이 동해를 입었던 탓이다.

추위에 살아남은 몇 가지에서 꽃이 듬성듬성 매달리긴 하였으나 별로 보잘 것이 없고, 내가 몇 년 동안 보아온 그 고유한 색상도 지니지 못한 한심스러운 꽃으로 변해버린 것이다. 이런 금년의 여건 속에서 이 능소화가 피기 시작했으니 내가 느끼는 감회가 각별한 것임은 당연하다.

내가 사는 양촌의 이메길을 가운데 두고 형성된 수백 호에 달아는 집들 중에 이 능소화가 있는 집은 한집밖에 없다. 그럴듯한 모습의 집이 아니라 거의 폐가가 된 집이다. 주인이 있는 것 같기는 하나 이집에 살지 않을 뿐만 아니라 도로보다 낮게 움푹 꺼진 땅에 지어진 볼품없는 스레트 집이다. 그런데도 이 집 돌담에 기대어 자라난 능소화가 한여름에 꽃을 피우고 있다.

주인이 있든 없든, 능소화는 아무런 내색 없이 그 집 담장의 이곳저곳에서 탐스러운 꽃을 피워 그 꽃송이가 주렁주렁 매달려있다. 어쩌면 측은하게 보이는 풍경이기도 하나 그 꽃만은 정말 탐스럽게 매달려있어서 매일 아침 산책을 하며 걸어가는 도중 내 눈을 즐겁게 해주고 있다. 그러나 이 집의 능소화는 이미 철이 지난 것으로 느꼈던지 꽃을 거의 떨구고 몇 송이의 꽃이 매달려있으나 우리 집의 능소화는 이제부터 그 찬란한 모습과 고귀한 멋을 풍기는 싱싱 색을 뿜어내고 있다.

나는 이런저런 글을 쓰면서 자허원군(紫虛元君)께서도 사람이 은혜를 갚는 방법을 일러주지 아니하여 나는 아직도 은혜 갚는 방법을 모른다고 썼다. 우리 집 능소화도 옛글을 읽은바 없겠으나 스스로 은혜 갚는 방법을 찾아 잠시 자신을 보살펴준 내게 이렇게 보답을 하고 있으니 사람도 마땅히 이 꽃을 보고 배워야 할 것이다.

정말 아름답구나, 능소화야! 네가 보여주는 그 색 말이다. 붉은색도 아니고 노란색도 아닌 주황색으로 보이는 그 색깔이 정말 신비스럽다. 주황색 바탕에 엷은 붉은색이 가미된 데다가 그 붉은 색 줄이 세로로 이어져 있어서 이런 색을 만들어내니 너의 재주가 참 신비스럽다. 그 뿐이냐? 꽃이 한 송이가 아니라 한 줄기에 십여 개의 꽃 봉우리가 맺혀 한 뭉치 큰 덩어리의 꽃다발을 만들어 전후좌우로 화사한 얼굴을 내보이고 있으니 얼마나 탐스러우냐?

이 더운 여름에 덥다고 찡그리지도 않고 환하게 웃으며 이리저리 흔들리면서도 꽃다발을 만들어 보여주고 있으니 너의 성품이 얼마나 너그러우냐?

내가 글을 쓰다 보니 또 눈이 피곤하구나. 어디 다시보자. 창밖으로 얼굴을 내밀어 다시 능소화를 바라본다. 여전히 고귀하면서도 아름답고 탐스럽게 보이는구나. 고맙다!

능소화야! 사람들이 사는 세상에서 몇 천 년 전부터 ’궁팔십(窮八十) 달팔십(達八十)‘ 이란 말이 전해온다. 주(周)나라의 강태공(姜太公)이 곤궁한 세월을 보내면서 나이 칠십을 넘겨 팔십을 바라보는 때에 문왕(文王)의 부름을 받아 출사(出仕)한 이래, 6대에 걸쳐 군왕을 보필하면서 백 수십 년의 수명을 이어갔다. 막중한 정사를 맡아 선정을 베풀면서 곤궁했던 기간만큼이나 영달하였던 역사적인 사실을 후세 사람들이 이런 말로 표현했다.

네게 이 말은 맞지 않는다. 너는 오랜 세월 고난을 겪으며 매년 봄 땅위에 얼굴을 내밀었다가 칼날에 베임을 당하며 땅속에 숨어 지낸 20년이었으나 이제 시절인연을 만나 새 세상을 보게 되었으니 너의 수명이 몇 백 년이 될지 알 수 없다. 나는 너에게 맞는 글자를 주어 20년간 네가 받은 설움의 일말이라도 풀어주고자 한다.

’궁이십(窮二十) 달수백(達數百)‘ 이것이 내가 네게 주는 나의 축문(祝文)이다.

잠시 눈을 들어 다시 창밖을 바라보니 제비 몇 마리가 네 위로 날아다닌다. 두 마리가 아니라 대여섯 마리 되는 것 같구나. 봄철에 작년처럼 두 마리의 제비가 우리 집에 찾아와 며칠간 지내다 날아갔는데 그 제비는 아닌 것 같다. 한 배에서 태어난 여러 마리의 형제들인 것으로 보인다. 날아다니는 모습이 봄철의 제비와 달리 좀 어설픈 것으로 보이고, 가끔씩 전선에 앉거나 공장 지붕에도 잠시 앉아 쉬는 놈도 있으니 비행연습을 하는 것 같이 보인다. 앞으로 두 달쯤 지나면 제비들은 남쪽으로 기나긴 여행을 떠나야하니 미리 비행연습을 하려는 것 같다.

또, 잔디밭에 앉아 꼬리를 촐싹거리다가 날아가는 새도 있었고, 천고재에 사는 참새 여러 마리도 네 주변을 날아다니고 있다. 그 새들 모두가 너의 아름다운 자태를 보려고 이리저리 날아다니는 것으로 짐작된다.

이런 새들 뿐만이 아니다. 이미 여러 사람들이 너의 아름다운 자태를 자세히 살피고 갔다. 네가 처음 꽃을 피운 후 일주일쯤 지난 때에 나의 검찰후배 십여 명이 부임인사 차 양촌을 찾아왔기에 내가 일부러 그들을 네 앞으로 데려와서 너의 아름다운 자태를 구경시켰다. 그 이틀 후, 판사와 대학교수 등 나의 고등학교 후배들도 찾아와 또 너의 모습을 보고 갔다.

그들 중 한사람이 너의 사진을 찍어 인터넷에 올려놓았더구나. 너의 명성은 이미 세상에 널리 퍼졌다. 명진사해(名振四海)라는 표현은 바로 이럴 때 쓰는 말이다. 이런 결과가 있었다하더라도 내가 이십년간이나 너를 소홀이한 잘못의 사과로서는 충분치 않을 것이다. 용서해라.

오늘이 광복절이니 미국 간 나의 딸 미현의 생일이다.

미현아! 네가 벌써 지천명(知天命)의 나이를 넘겼구나. 너희 가족들이 이곳 양촌에 찾아온 날이 7월 9일이었으니 너희 가족들은 이 꽃을 구경하지 못했다. 그 때의 능소화는 그 길이를 한껏 늘려갈 뿐, 꽃망울을 맺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 아름다운 꽃이 피어날 낌새조차 느끼지 못한 채 너희 가족은 상경한 후 미국으로 돌아갔으니 참 아쉬운 일이로다.

내가 이 글을 작년에 썼더라면 금년 5월에 발간된 나의 문집 <밤나무 검사의 글자취>라는 책에 실어놓았을 것이다. 작년까지 쓴 글만이 그 책에 실렸으니 이 글은 그 책과는 인연이 없는 글이다. 인연이 닿지 아니하였으니 너희들이 이 꽃을 보지 못하였으며, 이 글도 그 책에 실리지 못한 것이다. 꽃을 눈으로 꼭 보아야만 하는 것도 아니고, 글을 책에 꼭 실어야만 하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그것 또한 인연소치이다.

나의 사랑하는 딸 미현아! 오늘 네 생일날에 20년 만에 핀 능소화 꽃을 핸드폰의 카메라에 담아 그 사진을 보내며 이 글을 써서 너에게 준다.

2021. 08. 15.

天目軒에서 捨名利求仁義居士 쓰다.

<後記>

위 글은 그 말미에 명시된 바와 같이 일요일인 어제 쓴 글이다. 써놓은 글을 컴퓨터 자판으로 3페이지 정도 찍어두었으나 많은 시간이 소요되었다. 나의 워드프로세서 다루는 솜씨가 형편없기 때문이다.

오늘은 월요일로서 회사의 전 직원이 출근하였으므로 컴퓨터를 잘 다루는 여직원에게 부탁하여 내가 써놓은 글을 구술하면서 타자를 마쳤다. 나 혼자 몇 군데 수정작업을 수행하던 중, 회사직원 한 사람이 내 사무실로 들어와 핸드폰의 사진을 보여주며 이 새가 무슨 새인지 물어왔다. 그 사진을 보니 회사 냉동창고의 부속건물인 작업장의 천정 부근을 찍은 사진인데, 대낮에 그 천정 밑에 걸린 쇠줄과 그 부근에 여러 마리의 새가 앉아있는 모습이었다.

그 새들은 내가 그토록 귀히 여기는 제비가 틀림없었고, 10여 마리가 앉아 있는 사진이었다. 어제 내가 글을 쓸 때 능소화 주변을 맴돌며 날아다니던 그 제비가 틀림없음을 드디어 알게 된 것이다. 나는 5-6마리 정도의 제비가 날아다니는 것으로 보았으나 그 숫자가 틀려서 이렇게 많은 제비들이 어제 능소화 주변을 맴돌았던 것이다. 이 후기를 쓰기 전 점심식사를 마친 후 그곳에 가보았더니 도합 14마리의 제비가 여기저기 앉아서 쉬고 있었다.

경사로구나! 제비라 하여 꼭 박씨를 물어다주어야만 경사일 것이냐? 제비가 무리를 이루어 단체관광을 왔으니 능소화 구경 실컷 하고 잘 지내다 가거라. 너희들이 쉬고 있는 이 작업장의 두 개 큰 문은 당분간 닫지 말고 낮이나 밤이나 활짝 열어놓아 너희들이 그곳에 드나드는데 불편함이 없도록 하라고 전 직원에게 이미 일러두었다,

보아하니 금년에 세상구경 처음 하는 제비가 틀림없구나. 10월까지 비행연습 열심히 해서 망망대해를 건너가는데 지장이 없도록 단단히 체력단련을 해두어야 한다. 명심해라. 이 말 가볍게 들어서는 절대로 안 된다.

내가 당분간 여기 드나들면서 어떤 놈이 게으름을 피우는 지 잘 조사하겠다. 그래야 내가 내년에 너희들을 다시 볼 수 있을 것 아니겠니? 하하하.........

2021. 08. 16. 15:00 천목거사

사진: 천목거사 촬영분 3장
나머지 강민구

2021.8.16
송종의 전 법제처장과 강민구 서울고등법원 부장판사의 블로그 글에서

영남뉴스(ynnews.pe.kr/(sea4season@nat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