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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칼럼

ㆍ작성일	2022-05-26 03: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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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오현의 '모 아니면 도' 엘리트론(論)
삼성 초격차 전략 선도한 權
사장 취임 인사온 후배들에
개·걸 대신 모 아니면 도 주문

최악 리더는 적당히 하는 사람
거기에선 창조적 대응 안 나와
정부 엘리트도 마찬가지

윤석열정부의 초대 민관합동위원장으로 거론되고 있는 권오현 전 삼성전자 회장은 산업계의 현인(賢人)이라고 할 수 있는 인물이다. 삼성 반도체의 '초격차' 전략을 선도했고 같은 이름의 책도 내놓았다. 그와 대화하면 오랜 경륜과 천착이 벼려낸 주옥같은 지혜가 자연스레 흘러나온다.

필자가 권 전 회장에게 가장 인상적으로 들었던 얘기는 '모 아니면 도'론(論)이다. 그는 20년 가까이 사장 이상의 직책을 맡았기 때문에 후배들이 새로 사장에 임명되면 인사를 하러 온다. 그는 "사장에서 잘리더라도 먹고살 만큼은 재산이 있지 않나"고 묻는다. 대부분 그렇다고 답한다. "그러면 '개나 걸' 할 생각 말고 '모 아니면 도' 할 생각으로 일하라"고 충고한다.

국내에는 재벌 회장들이 전문경영인을 너무 맘대로 바꾼다는 비판이 있다. 그러나 권 전 회장의 생각은 다르다. 회장보다 전문경영인에게 문제가 더 많다는 것이다. 회장 입장에서 '개나 걸' 하는 경영자들은 쉽게 찾을 수 있다. 그래서 사장직에 올라 그 정도밖에 못하는 사람은 쉽게 바꾼다. 반면 '모 아니면 도'로 일하는 사람은 찾기 어렵다. 그런 사람이 성과를 내면 회장은 계속 일을 줄 수밖에 없다. 권 전 회장은 후배들에게 자리에 연연하지 말고 과감하게 일해야 회사도 좋아지고 본인에게도 좋다고 말한다.

권 전 회장의 '모 아니면 도'론은 기업뿐 아니라 정부의 엘리트에게도 똑같이 적용되는 원리다. 하위나 중급 직원에게 "잘못되면 옷 벗을 각오로 일하라"고 요구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조직의 장(長)으로 올라선 엘리트에게는 사명(使命)이다. 어느 정도 잘살게 된 한국에서 기업이나 정부의 엘리트에게는 경제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상당한 특권이 주어져 있다. 다른 걱정 말고 주어진 역할에 전력투구하라고 만들어준 기반이다.

그러나 많은 엘리트들이 딴생각을 한다. '개나 걸' 정도 하면서 직책이 주는 좋은 것들을 누린다. 그리고 물러나면 조직에는 각종 어려움이 발생한다. 권 전 회장이 얘기하는 '최악의 리더'다. 기업에도 실적을 부풀리면서 돈과 노력을 엉뚱한 곳에 쓰는 리더들이 종종 있다. 지난 정부에서도 돈 퍼주기와 일자리 및 분배 통계 왜곡 등의 문제가 불거졌다.

엘리트들이 '모'를 하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한가? 혁신 연구의 대부 슘페터는 '적응적 대응'과 '창조적 대응'이라는 말로 설명한다. 적응적 대응은 주어진 여건을 받아들인 상태에서 대응하는 것이고, 창조적 대응은 여건을 극복하는 것이다. 적응적 대응만 하는 기업은 '개나 걸' 수준의 '정상이윤'으로 만족한다. 그러나 '초과이윤'을 노리는 야심적 혁신가들은 남들이 여건이라고 받아들이는 것을 바꿔나가며 '새로운 조합'을 만들어낸다.

현실에서는 기업이나 정부 엘리트들에게 적응적 대응 요구가 쏟아진다. 한 정부 기관장은 국회와 언론 대응에만 업무 시간의 절반은 사용하는 것 같다고 푸념했다. 엘리트 스스로 창조적 대응에 시간과 능력을 많이 할애해야 한다. 권 전 회장은 이를 위해 '하지 않아도 될 일 목록(not-to-do list)'을 만들 것을 권유한다. 많은 엘리트들이 '할 일 목록(to-do list)'만 만들어놓고 허우적거린다. 그러면 변화를 위해 필요한 시간을 확보하지 못한다. 조직 구성원들에게 분명한 메시지를 전달하지도 못한다.

이와 함께 중요한 것은 회장이나 대통령 등 최고 의사결정권자의 자세이다. '모' 하려는 사장과 장관을 북돋워야 한다. 이것은 기업 회장보다 5년 단임제 대통령에게 더 힘든 과제일 것이다. 권 전 회장의 경우처럼 20년 가까이 고위직을 주는 것이 불가능하다. 그렇지만 '모' 하려는 장관을 최대한 밀어주며 헌신과 혁신을 요구해야 한다는 원리는 변함이 없다.

[신장섭 싱가포르국립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