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 산은 아득히 음기가 서려 있고 故山渺渺豫章陰
대지의 바람은 차고 눈은 깊이 쌓였는데 大地風寒雪正深
창을 올리고 편히 앉아 주역을 읽노라니 燕坐軒窓讀周易
가지 끝에 흰것 하나, 하늘 뜻을 보이네 枝頭一白見天心

- 정도전(鄭道傳), 〈매설헌도(梅雪軒圖)〉, 《삼봉집(三峯集)》

큰 가지 작은 가지 눈속에 덮였는데 大枝小枝雪千堆
따뜻한 기운 알아 차례로 피어나네 溫暖應知次第開
옥골정혼이야 비록 말은 없지마는 玉骨貞魂雖不語
남쪽 가지 봄뜻 따라 먼저 망울 맺는구나 南條春意最先胚
- 김시습(金時習), 〈심매(探梅)〉, 《매월당집》

겨울 신이 무슨 일로 꽃피우는 권한을 훔쳐 玄冥何事竊花權
일부러 백옥 같은 꽃을 납일¹⁾ 전에 보냈네 故道瑤華送臘前

삼라만상이 아직 동면에서 깨어나기도 전에 매화꽃은 피어나서 냉담한 운치에 그윽한 향기마져 풍겨 한층 더 감을 깊게 하고 있다.

또 근대시조에서도 다음과 같이 이른 봄에 피는 매화를 상찬하고 있는 경우를 볼 수 있다.

봄이 왔다기로 창을 열고 바라보니
찬바람 쓰라리고 눈조차 의연한데
창밑에 웃는 매화 봄여기왔소 하더라.
- 양상경, 근대시조 〈매화〉

 

고려 말의 승려 보우(普雨)는 섣달 어느 날 하루종일 난간에 기대어 매화꽃에 내리는 눈을 보다가 이 시를 짓고 그래도 부족해서 한 화가를 불러 그 모습을 병풍에 그리게 했다고 한다.

여기에서 보우는 하늘에서 눈이 매화나무 위에 송이송이 내리는 모습을 천천만만편(千千萬萬片)이나 천편만만편(千片萬萬片) 등의 표현을 하지 않고 또 편(片)자를 5자나 7자가 아닌 6자를 연이어 써서 표현하고 있다. 눈송이가 계속해서 떨어지지만 봄의 길목에서 폭설이 아닌 담설(淡雪)이 찬찬히 내리는 모습을 그렇게 표현했을는지 모른다. 그렇게 내리는 하얀 눈이 매화꽃 하얗게 핀 가지 사이로 날아드니 어느 것이 꽃인지 어느 것이 눈인지 분간하기 어려운 것이다.

그러나 그 눈은 담설(淡雪)이고 세설(細雪)이다. 담설이 휘날리는 것은 매화에 이어 백화(百花) 내방의 전조이다. 따뜻한 봄도 이젠 멀지 않다.

매화는 봄바람의 힘에 의해 피어난 것이 아니라 잔설(殘雪)의 도움으로 담장(淡粧)을 하고 있다고 한다. 이른 봄 잔설이 아직 산야를 덮고 있는데 달이 뜬 황혼에 매화꽃은 한 잎 두 잎 휘날리며 지고 있다. 설경 속의 낙매화(落梅花)는 한폭의 그림이다.

 

백설이 천지에 가득하니 모든 산은 옥을 깔아놓은 듯 눈이 부시는데 매화는 반 정도 피었다. 거기에 죽엽이 푸르러 조화를 이루고 있다. 천지가 눈으로 덮여 있는데 그 속에서 피어난 흰 매화와 푸른 대나무 - 그곳에는 티끌만큼의 속기(俗氣)도 보이지 않는다. 어딘지 숭고하고 신비하며 순수하고 결백한 얼이 비치는 것 같다. 그리고 그것은 생의 승리와 환희를 느끼게 한다. 저절로 봄의 흥취를 일어나게 하는 것이다.

다음에는 매화와 달이 짝이 된 경우를 살펴보자. 교교한 달빛 아래 하얗게 피어난 매화의 모습은 너무나도 조화로운 운치를 느끼게 한다. 그것은 고아함의 화신이요, 정절의 상징이었다. 그래서 수많은 선비들은 이 정경에 아낌없는 찬사를 보냈다.

창 아래엔 매화나무 몇 가지 뻗어 있고 窓下數枝梅
창 앞에는 둥근 달이 둥실 떠 있네 窓前一輪月
맑은 달빛이 빈 사립문에 흘러드니 淸光入空査
남은 꽃이 계속해서 피어나는 듯. 似續殘花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