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법원의 현저한 재량권
살인죄·신의칙·손해배상
법관이 광범위한 재량 행사
법관과 인연있는 변호사 써
재판에 영향 미친다고 믿을땐
법에 대한 신뢰에 독 될수도
오늘날 법치주의 또는 법의 지배는 강조할 필요가 없을 만큼 자명한 우리 사회의 지표가 되었다. 그런 만큼 법의 운용을 직접 담당하는 법률가들의 중요성은 새삼 말할 것도 없다. 그런데 우리나라 법에는 다른 나라에서는 찾기 어려운 중요한 특징들이 있다. 검찰은 잠깐 놓아두고, 법의 최후 보루라는 법원 또는 법관 자신을 미리 마련되어 예측할 수 있는 합리적 기준에 의하여 통제하여야 한다는 법치주의의 필수적 요구라는 관점에서 살펴보자.
우선 법률 자체가 다른 나라들에 비하면 법관에게 광범위한 재량을 주고 있다. 쉬운 예로 살인죄에 대하여 법에서 정해진 벌은 사형, 무기 또는 5년 이상 징역이고, 거기다 막연하기 그지없는 '범죄의 정상(情狀)에 참작할 만한' 사유가 있다고 해서 징역형의 하한을 2년6월로 감경하면 집행유예도 가능하다. 피고인 입장에서 보면 하늘과 땅의 차이가 있는 이러한 형의 스펙트럼 중에서 무엇을 선택하는가가 재판을 하는 법관에게 맡겨져 있다고 함은 전에도 쓴 바 있다.
나아가 우리의 법관은 법률 등에 명시적·구체적인 정함이 없음에도 현저한 재량을 행사한다. 두드러진 예가 내 전공인 민법에서 보면 신의성실의 원칙, 줄여서 신의칙이라고 불리는 만병통치약으로서 우리 법원은 이를 금과옥조로 여긴다. 이 법리는 권리의무의 발생 여부나 내용을 법에 정해진 구체적 사실을 넘어서 당사자들의 모든 사정을 고려하여 정하도록 하는 게 출발점이다. 그러므로 이는 실정의 법 규정이나 계약서에 명확하게 정해진 바를 확장·제한 또는 아예 도외시할 가능성을 내포한다.
예를 들면 2010년 전후해서 이른바 과거사사건 이외에도 소멸시효의 주장을 신의칙에 반한다고 하여 배척하는 판결이 많이 나왔다. 그러나 소멸시효 제도는 기본적으로 오래된 일은 새삼 들추지 않는 것이 지금의 생활을 안정시킨다는 법적 안정성 이념에 기한 것이다. 그러니 위와 같은 법 운용은 쉽사리 인정할 일이 아니라는 생각도 든다. 권리자가 10년(민법이 정하는 시효기간) 넘게 두고 보기만 해서 통상이라면 소멸시효 주장을 받아들였을 것임에도, 이제는 재판이 끝나 보아야 비로소 귀추를 알 수 있게 되었다.
또 손해배상법에서는 법원이 이런저런 사정을 들어 종국적으로 가해자가 배상할 금액을 깎아주는 경우가 매우 많다. 이는 법원 실무가 손해배상 제도가 기본적으로 언필칭 '손해의 공평한 분담'을 도모하는 것이라는 이해에서 출발한다.
그 공평이라는 막연한 지표는 결국 법관의 정의 감각에 의존하여 그 구체적 내용이 정해지기 십상이다. 민법에는 '손해의 발생이나 확대에 피해자에게 과실이 있는 경우'에만 배상 책임을 감경 또는 면제하는 과실상계만을 정하고 있다. 그러나 예를 들면 자연재해, 피해자의 기왕증이나 특이체질처럼 결코 피해자의 '과실'이라고 할 수 없는 경우에도 그러한 처리가 이루어진다.
이제는 더 나아가 일정한 사건 유형(국가 배상이나 회사 이사의 책임 등)에서는 '관련자들의 제반 사정을 고려하여' 법원이 배상액을 깎아주는데, 이러한 처리를 할 사건 유형 자체를 법원이 정한다. 이는 사람 사이의 분쟁에서 중화적(中和的) 해결을 좋게 여기는 기본 태도('너도 조금, 나도 조금 양보한다')가 배경에 있는 듯도 하다. 이처럼 법관에 기대는 일이 많아지면 법의 유연성은 보다 증진될지 모르지만 그 불확실성도 높아져서 종국적으로 판결을 받아보기 전에는 국민의 권리관계를 미리 말할 수 없게 된다. 특히 우리처럼 재판을 하는 법관과 '인연'이 있는 변호사를 대리인·변호인으로 선임하고 그러한 인적 관계가 재판에 영향을 미친다고 믿는 경향이 두드러지는 사회에서는 그러한 유연성이 오히려 법에 대한 국민의 신뢰에 해를 입힐 가능성도 크지 않을까.  [양창수 한양대 석좌교수]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