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희 회장은 르네상스맨이었다
경계를 뛰어넘는 발상
기존 틀 깨는 유연성으로
제조업 르네상스 이끈 이건희
그가 있어 세상은 달라졌다
고대 그리스에서는 철학자와 수학자와 과학자의 경계가 분명하지 않았다. 피타고라스나 플라톤은 이런 보편성의 재능을 선명하게 보여준다. 고상한 지식도 인간의 삶을 향상하는 데 사용돼야 한다고 믿었던 아르키메데스는 박학다식형 보편가의 전형이어서 한 분야의 성취를 타 분야에 적용하는 일에서 달인의 경지에 이르렀다.
세상은 훨씬 복잡다단해졌고 전문화는 가속화되는 추세다. 매년 10월 어김없이 찾아오는 노벨상 발표 때마다 언론이 혼선을 겪는 일도 잦다. 스타 학자들의 업적에 대해 누구에게 설명을 부탁해야 하는지 파악하는 것도 간단하지 않아서다. 경제학자나 물리학자라고 통칭하지만 미시경제학자는 거시경제의 이슈를 논하는 게 부담스럽고, 입자물리학자는 고체물리학의 최근 흐름에 대해 말하는 걸 피한다.
전문가의 의미가 좁고 깊은 성취를 의미하게 되자 여러 분야를 넘나드는 사람을 뜻하는 보편가나 `르네상스맨` 같은 표현이 각 분야의 얕고 낮은 성취를 뜻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지게 됐다. `한 우물을 파라`는 말은 미래의 전문가를 꿈꾸는 아이들에게 금과옥조가 됐다.
하지만 특정 분야 전문가들이 그 분야의 프레임으로 난제와 싸우고 있을 때 엉뚱한 분야의 전문가가 끼어들어서 자신 분야의 지적 도구를 적용한 새로운 발상으로 오랜 난제를 해결하는 사례는 빈번하다.
업적이 결코 낮지도 않다. 24세에 미국 UCLA의 종신직 정교수가 되었고, 29세 나이에 수학 분야의 최고 상인 필즈 메달을 받은 수학자 테런스 타오는 현대판 르네상스맨의 전형이다.
수학의 주요 분야인 정수론의 오랜 난제를 해결한 것이 그의 업적인데, 원래 연구 분야는 상당히 결이 다른 조화해석학이었다. 정수론자들이 오랫동안 골머리를 앓던 소수에 관한 문제에 자신의 연구 분야에서 사용되던 무작위성을 도입해 성공했다. 위상수학 분야 업적으로 필즈 메달을 수상한 스티븐 스메일은 동역학계 분야로 바꾸었다가 나중에는 수치해석과 과학계산 분야 대가가 됐다.
그렇다. 한 분야의 전문가들이 프레임 `안`에서 골머리를 앓고 있을 때 선도자들은 프레임 자체를 전환하거나 확장해 이전에 없던 전혀 새로운 프레임을 만든다. 그들은 자신의 지식과 경험에 확신을 갖고 자신이 새롭게 짠 프레임으로 세상을 재정의한다.
한국 제조업 르네상스가 20세기 말 선친의 뜻을 이어받은 고(故)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으로부터 본격화했음을 부인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고인은 자신의 우물에 갇히기를 늘 거부했다. 경제와 경영을 전공하고도 전자제품을 혼자 뜯어보는 연구가가 바로 이 회장이었다. 퇴근 후 술자리 대신 기계를 분해하고 조립하며 품질의 격차를 스스로 파고들었는데 그 옆의 책장에는 경영학 서적 대신 미래과학이나 항공, 우주, 자동차 등 공학 관련 서적이 촘촘했다는 일화도 고인의 유연했던 사고관을 뒷받침한다.
이건희식 창조 경영은 그렇게 나왔다. 이 회장은 자신이 만든 프레임, 경영의 새 엔진을 세상에 장착시켰다. `3저 호황`의 그늘에 숨지 않았던 1993년 신경영 선언, 불량률 높던 전화기 15만대를 불로 태워버린 1995년 화형식이 있었기에 삼성 제품은 세상의 표준이 됐다.
2010년 3월 24일, 은둔하던 고인은 경영 일선에 복귀하며 "10년 안에 삼성을 대표하는 사업과 제품 대부분이 사라질 것"이라고 경고했다. 르네상스 정신이 기업에 부재할 때 그건 생존을 가르는 비명이 된다. 선도자들은 지적 호기심으로 가득 차 있고 자신의 전문 분야에 갇히지 않는 공통점이 있다. 지식의 총량이 걷잡을 수 없이 커지고 있는 이 시대에는 역설적으로 르네상스맨이 살아남을 가능성이 높은 것 아닐까. 한국 제조업의 르네상스를 이끌었던 이건희 회장이 영원의 안식에 든 지금, 불굴의 개척정신으로 다음 르네상스를 추동할 새 르네상스맨의 출현을 기대한다.  [박형주 아주대 총장]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