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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급과잉의 시대
2010년 3월 한국 경제를 큰 혼란에 빠뜨린 기획재정부 내부 자료가 공개된다. 자동차 조선 철강 등 한국의 5대 주력 산업이 글로벌 공급과잉에 타격을 받아 심각한 위기를 맞을 것이란 경고를 담은 자료였다. 조선업 공급과잉률은 14%, 자동차산업은 무려 57%에 달했다.
당시 이들 산업은 이미 중국발 글로벌 공급과잉의 충격을 받고 있었다. 하지만 정부는 손놓고 있었고, 내부 자료로만 갖고 있다가 끙끙 앓고 있었다. 글로벌 금융위기 때 국가 간 수출 경쟁에서 뒤지지 않으려다 산업 구조조정을 게을리했던 셈이다. 정치권도 행여 구조조정을 하다가 역풍을 맞을 것을 두려워했다. 감원이나 폐업 때문에 2년 뒤 예정된 총선에서 패배를 걱정한 탓이다. 지역경제 파탄을 우려한 지역구 의원들은 좀비기업 살리기에 앞장서기까지 했다(최근 성완종 게이트도 그 연장선상에 있다).
그 뒤 글로벌 공급과잉이 가속화하면서 한국 기업들은 부실기업으로 전락해야 했다. 좀비기업 양산으로 이어지면서 전체 경제마저도 활력을 잃었다. 신성장산업으로 흘러들어가야 할 자금이 부실기업을 살리는 데 쓰이면서 투자가 늘어나지 않았던 셈이다. 한국 경제가 장기 저성장의 길로 빠져들게 된 경로 중 하나다.
더 심각한 것은 2010년 당시 상황이 재현되고 있다는 점이다. 글로벌 공급과잉에 국내 주력 업종들은 여전히 부실 상태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는데 정치권은 뒷짐만 지고 있다. 심지어 최근 3조원대 손실을 뒤늦게 공개한 대우조선해양 사태가 벌어지기까지 했다.
제2차 글로벌 공급과잉마저 예고되고 있다. 중국이 향후 주력 산업으로 육성할 업종이 한국 미래 전략 산업과 겹치는 것은 물론 정보기술(IT)이나 사물인터넷(IoT)을 활용한 제조업 육성 전략도 한국과 같다는 점에서다.
최근 수출입은행은 그나마 삼성중공업의 성동조선 `위탁경영`을 이뤄내면서 조선업 구조조정 생색을 냈다. 하지만 실효성은 의문이다. 오히려 좀비기업만 연명시킬 것이란 우려가 많다.
이젠 선거에 질 각오로 구조조정에 나설 제도적 기반을 찾아야 할 때다. `글로벌 공급과잉→주력 산업 악화→좀비기업 양산→한국 경제 활력 저하`라는 악순환의 고리를 끊을 때가 됐다. 글로벌 공급과잉을 국제공조를 통해 해결할 수만 있다면 좋겠지만 그건 우리의 의지와 무관하다.
선거 승리에 집착하는 정치권 때문에 부실기업 수술 시기를 놓치는 상황부터 바꾸는 게 근본 대책이다. 대통령 단임제 아래에서는 산업 구조조정이 계속 미뤄질 판이다. 외환위기 같은 커다란 외부 충격을 겪고 나서야 산업이 재편될 게 분명하다. 해법은 대통령 연임제 도입이다. 그러면 집권 초기부터 경제의 장기 생명력을 챙길 가능성이 커진다.
요즘 시진핑 중국 정부는 증시 거품을 빼기 위해 주가 하락을 방치하고 있고, 주력 산업에 대한 투자 속도를 줄이면서 구조개혁을 단행하고 있다. 6%대 경제성장률을 적정한 규모로 인식하고 장기 전략을 짜고 있는 셈이다. 중국 국가주석은 5년 임기를 마친 후 5년 연임할 수 있기 때문에 가능한 현상이다. 미국 등 대통령제를 도입한 95개국 중 83개국이 중임제나 연임제를 채택하는 것도 다 이런 이유다.
대통령 연임제 도입은 국민적 합의가 필요하기 때문에 비교적 장기적 해법이라면 단기적 해법으론 공급과잉 업종 내 `자발적 빅딜`이 꼽힌다. 성동조선식 `찔끔 구조조정`이 아니라 선거에서 지더라도 망할 곳은 망하게 하고, 살아날 가능성이 있는 기업은 다른 기업들과 경쟁 관계가 아닌 협력 관계를 구축하는 방식이다. 가령 대우조선해양 지분을 현대중공업 같은 대기업이 가져가는 방안을 생각해볼 수 있다. 그러면 글로벌 업계 순위 1·2위인 경쟁사들이 협력사가 되고, 공급과잉이란 멍에를 해결할 가능성이 커진다.
다행히 요즘은 `통화 공급과잉의 시대`이기도 하다. 미국이나 일본의 양적완화 여파로 글로벌 유동성이 풍부하다. 그만큼 우리 시중에도 기업 인수·합병(M&A)을 떠받쳐줄 자금이 많다는 얘기다.
정부는 이런 시장에 의한 자발적 구조조정이 가능하도록 세제나 고용 등 제도적 인센티브를 하루빨리 마련할 때다. 미국이 이달부터 금리를 올리게 되면 이마저도 물거품이 될 수 있다. 과거 외환위기 때 `IMF발 구조조정`처럼 타의에 의해 수술대에 오를 수밖에 없다. 우리에게 시간이 그리 많지 않다.
[김명수 매일경제 금융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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