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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칼럼

ㆍ작성일	2015-01-11 1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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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 희망 찾기
해마다 이맘때면 새 달력을 바라보며 지난해를 정리하고 새해의 각오를 다진다. 그러나 나이를 먹으니 이런 일에 별다른 의욕이 느껴지지 않는다. 새로운 시간에 대한 흥미를 잃어가는 일은 새로운 사람들에 대한 흥미를 잃는 일이고 새로운 일에 대한 흥미 또한 잃는 일이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이렇게 의욕을 잃는 것이 나이 탓만은 아닌 것도 같다. 새로운 날을 가슴 두근거리며 기다리지 않게 된 것은 지난날의 쓴 기억들 때문인 것도 같다. 또다시 좌절감을 맛보지 않기 위해 미리 기대를 거세해버리는 심리가 잠재돼 있는 듯하다.

세월호·땅콩 회항… 우리사회 민낯

지난 한해 우리 모두 죽을 때까지 잊지 못할 일들을 겪었다. 세월호 참사 등으로 사회문화 전반의 실패라는 말이 마음속에서 떠나기도 전에 조현아 전 대한항공 부사장의 '땅콩 회항' 사건이 터지고 새해가 밝았다. 연일 뉴스에는 많은 이야기와 이미지가 난무했다. 이런 일들을 겪으면서 필자가 갖게 된 감정은 분노보다 실망감과 좌절감이었다.
그것은 잘 알지도 못하는 선장이나 재벌가를 향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사회에 대한 것이라고밖에는 말할 수 없는 감정이었다. 내가 애착을 갖고 살던 곳이 이런 세상이었던가. 선진사회로 진입했다고 자랑스러워했던 사회의 이면은 너무 흉물스럽고 후진적이었다. 우리가 커튼 뒤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에 너무 무관심했거나 필자 또한 그 체계와 문화의 일부가 돼 둔감했거나, 어느 쪽이든 부끄러운 일이다.

이런 사건들은 현상적으로는 문제를 가진 개인들이 만들어내는 것처럼 보이지만 곰곰 생각해보면 그들을 만들어낸 것은 우리 사회의 조직과 문화, 즉 넓은 의미의 사회 시스템이다. 누군가 왕처럼 군림한다면 그것은 왕 홀로 되는 일이 아니다. 그가 딱히 힘이 장사거나 성격이 포악스러워 군림하는 것이 아니다. 왕은 왕정체제하에서 만들어지는 것이고 왕의 힘은 그 체제에서 나온다. 어떤 힘이든 힘은 행사돼야 힘이 된다.
자기 돈으로 아무것도 할 수 없다면 그는 부자가 아니다. 힘은 행사돼야 하고 확인돼야 한다. 그래서 왕은 호령하고 어깨들은 거들먹거리고 식자들은 아는 체를 하게 되는데 이런 행동은 제어되지 않는 한 지속된다. 왜냐하면
힘은 지속적인 힘의 확인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힘을 가진 사람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그 힘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아 확인하기 어려워지는 일이다. 힘을 가진 사람들은 따라서 힘을 견제하거나 제어하는 장치들을 어떻게 해서든 무력화하려 할 것이다.

플라톤의 '국가론'에는 기게스라는 목동의 전설이 등장한다. 목동은 우연히 갖게 된 반지가 자신을 투명하게 만드는 신비스러운 효능을 발휘한다는 것을 알고 그것을 이용해 왕을 죽이고 왕좌와 왕비를 빼앗는 패악을 저지른다. 여기서 우리는 묻는다.

인간의 도덕적 행위는 처벌에 대한 두려움 때문인가. 처벌받지 않으리라는 보장만 있다면 우리는 무슨 짓이든 할 것인가. 현실세계의 인간들은 그럴 개연성이 크다. 도덕이나 정의를 이루게 하는 것은 행위하는 인간의 품성이나 덕성이 아니라 그것을 적절하게 구현하는 유형·무형의 제도적 장치들이다. 우리 사회에서는 아직 이 제도적 장치들이 허술하다는 것이 여러 대형 사건들에서 확인됐다.

사회 시스템 바로잡는 한 해 됐으면

우리 모두는 사적 개인이지만 동시에 공적인 인간이다. 연고로 얽힌 우리 사회 안에서 공적 규범이 헛된 형식으로 전락하면 희망이 없다. 아버지 회장이 임원 딸을 대신해 사과하는 모습을 보며 혼자 묻게 된다. 공적 조직 안에서 작동됐어야 할 규범은 어디로 갔을까. 이사회·노조는 이제껏 어디에서 무엇을 했을까. 꼬리를 무는 물음들이 새날의 삶에 대한 의욕을 일깨운다. 정말 새해는 새로운 해가 됐으면 좋겠다.

김혜숙 이화여대 철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