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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리 가려거든 함께, 곡선으로
지방 행사에 참석하느라 국내선 아침 첫 비행기를 탔다. 동행에 정부 각료와 국회의원을 지낸 분이 있어 몇 시간을 함께 보냈다. 일찍 출세를 하고 요직을 두루 거친 분이라 그 시각과 경륜에 남다른 장점이 많았다. 그런데 놀랍게도 세상을 바라보는 사고와 인식은 차갑게 굳어 있었다. 그만했으면 유연하고 아량이 넘치기를 봄바람같이 해도 될 텐데 싶었다.
그 와중에 내 생각의 바닥을 채우며 떠오르는 인물은 강영훈 전 총리였다. 필자가 통일부 관련 이산가족위원회 실무 책임을 맡아 일할 때였다. 세종문화회관에서 `이산가족의 날` 기념식을 마치고, 2부 공연을 위해 이분을 무대에서 2층 귀빈석으로 안내하다가 길을 잘못 들었다. 금방 방향을 바로잡기는 했으나 등에서 진땀이 날 실수요, 결례인 상황이었다.
그분도 놀라서 가만히 서 있더니, 그냥 말없이 내 어깨를 몇 차례 두드려 주었다. 나는 감사하다는 인사도 못한 채 오랜 세월을 보냈다. 그런데 해를 거듭할수록, 그 난감했던 장면이 무슨 각인의 순간처럼 나를 따라다녔다. 특히 다른 사람 잘못을 눈앞에 두었을 때 내가 이해와 용서를 받았던 감동의 체험을 되새기게 했다.
중국 현대사 인물 중에 낮은 마음의 겸손으로 가장 존경받는 인물이 저우언라이(周恩來)다. 1946년 공산당 중앙위원들이 옌안에서 충칭으로 이동하는 항공기에서 갑작스러운 비상사태를 맞았다. 날개에 결빙이 생겨 위험할지도 모르니, 낙하산을 매라는 기장의 안내 방송이 나왔다. 모두 낙하산을 매었지만 한 소녀가 자기 것을 찾지 못해 울음을 터뜨렸다. 저우언라이는 가만히 자기 낙하산을 벗어 소녀에게 주었고, 항공기는 사고 없이 무사히 착륙했다.
중국 마지막 황제였던 선통제 푸이를 따뜻하게 돌보아 준 일을 비롯해서 그가 남긴 겸양과 배려의 일화는 너무도 많다. 바늘이 주머니 속에 있으면 삐어져 나온다(囊中之錐)고 했던가. 그의 사람됨은 `죽의 장막`을 넘어서 온 인민과 세계에 권력자의 모범으로 알려졌다. 그는 마오쩌둥(毛澤東) 아래 2인자였으나 마오 심기를 다치지 않는 지혜를 발휘했고, 그런 연유로 자리를 오래 지켰다.
중요한 것은 그가 처세의 달인이었다는 사실이 아니라 그의 내면에 올곧고 온정 어린 심성이 넘치고 있었다는 보다 근본적인 문제에 있다. 보석의 가치가 그것을 치장한 부속물에 있지 않고 보석 그 자체에 있듯이, 저우언라이 자신이 이미 존경받는 품성의 소유자였다. 헤밍웨이 부인이자 전쟁 전문기자였던 마사 겔혼은 이렇게 썼다. "저우언라이는 우리가 중국에서 만난 사람들 가운데 유일하게 좋은 사람이었다. 중국 공산당원들이 모두 그와 같다면 중국 미래는 분명히 그들에게 있을 것이다."
인류 역사에서 존경받는 위인들은 한결같이 그 이름의 무게에 비해 삶의 방식이 따뜻하고 소박했다. 그들 언행은 조촐한 가운데서 품격이 있었다. 그리고 언제나 공동체를 위한 꿈에 부풀어 있었다. 아메리카 인디언 속담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빨리 가려거든 혼자 가라. 멀리 가려거든 함께 가라. 빨리 가려거든 직선으로 가라. 멀리 가려거든 곡선으로 가라. 외나무가 되려거든 혼자 서라. 푸른 숲이 되려거든 함께 서라."
또 한 해의 이름이 바뀌었다. 새해에는 보다 더 나누고 베풀며, 지혜롭고 인격적인 삶을 살 수 없을까. 한 나라 지도자가 그렇게 한다면 국민의 국가관이 바뀔 것이요, 기업 CEO가 그렇게 한다면 직장이 새 희망으로 가득할 것이다. 그보다 앞서기로는 이 글을 쓰는 나 자신부터 지난날을 돌아보며 그렇게 고쳐 나갈 일이다.
[김종회 경희대 교수ㆍ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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