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해관계를 생명으로 하는 국제 관계에서는 당연히 이런 법칙이 성립하죠. 특정 국가가 손해 보는 장사를 하고 있을 때는 또 분명 그 같은 이유가 있는 겁니다. 예를 들면 미국은 지난 수십 년간 한 번도 적자를 보지 않은 적이 없었지요. 이건 미국이 기축통화인 달러를 갖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적자를 통해 해외로 유출된 달러는 각 나라를 돌면서 기축통화로 전 세계의 통화 노릇을 하며 유동성을 공급했지요. 미국 입장에서는 윤전기에서 달러를 찍어내기만 하면 전 세계에 있는 물품을 공짜로 살 수 있는 셈이었어요.
여기서 발생한 엄청난 규모의 적자는 미국 정부가 발행한 국채로 다시 미국으로 흘러 들어갑니다. 이를 통해 미국은 막대한 경상적자와 재정적자를 해소하고 반대급부로 해외 여러 나라 금고에는 미국 국채가 차곡차곡 쌓이게 되죠.
이게 지금까지 수십 년간 유지되던 당연한 패턴이었어요. 미국은 기축통화 발행국이라는 슈퍼파워와 전 세계 분쟁에 개입하는 군사국가로서 역할을 수행하며 글로벌 유동성 공급자로서 본질에 충실해왔죠. 하지만 달도 차면 기우는 법.
중국과의 무역적자가 급증하고 더 이상 패권국가로서 미국 역할에 관심이 없어지는 미국 국민들 목소리가 커지자 도널드 트럼프라는 인물이 나타나 미국 대통령 자리에 올랐죠. '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를 내세운 트럼프 대통령은 미국의 제조업 경쟁력을 높여 미국 살림살이를 좋게 하겠다는 공약을 내세웁니다. 지금 중국과 무역분쟁을 벌이는 것 역시 다분히 의도적인 스탠스라고 볼 수 있지요. 명분은 급증하고 있는 대중국 무역적자입니다.
2017년 미국 무역적자가 5660억달러(약 638조원)인데 그중 중국과의 무역적자 규모가 3752억달러(약 423조원)에 달했습니다. 물론 미국 입장에서 단순히 막대한 규모의 대중국 무역적자만 보고 이번 무역분쟁의 포문을 연 것은 아니겠습니다(미국 역시 미국이 보는 막대한 적자가 글로벌 달러 유동성 공급 측면이라는 것을 모르는 바는 아니거든요.
하지만 겉보기로 확연히 드러나는 숫자의 상승세가 좋은 명분이 되는 것은 확실하다고 하겠습니다).
최근 하노이에서는 흥미로운 행사가 열렸습니다. '한국·베트남 자유무역협정(FTA) 발효 3주년'을 기념한 세미나였어요. 법무법인 광장, KOTRA 등이 공동으로 개최한 '한국·베트남 무역·투자 관계의 새로운 지평'이라는 세미나였습니다.
이 세미나를 관통한 핵심 메시지가 한국과 베트남 간 무역수지가 지나치게 편중돼 있다는 내용이었어요. 한국과 베트남 관계에 관심이 많은 독자라면 관심 있게 지켜볼 내용이기에 이 지면을 통해 간략히 소개합니다.
한국과 베트남은 2015년 12월 FTA를 발효했습니다. 가뜩이나 둘 사이 무역 규모가 확대되고 있었는데 FTA는 불에 기름을 끼얹은 국면이 됐죠. 베트남은 한국의 4위 교역국입니다. 한국은 베트남의 2위 교역국이자 1위 투자국이 됐지요.
그런데 지난해 한국이 베트남을 상대로 기록한 무역흑자만 315억8000만달러(35조6600억원)에 달했습니다. 한국은 전 세계에서 거두는 무역흑자의 약 3분의 1을 베트남에서 거두죠. 왜 그럴까요. 베트남은 한국 1인당 국민소득의 10분의 1에 불과한 작은 나라인데 말이죠.
그건 두 나라 간 상호 의존도가 매우 높기 때문이에요. 삼성전자를 필두로 한 거대 생태계가 베트남에서 돌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간단하게 설명하면 이런 겁니다. 베트남은 완제품을 생산하는 나라입니다. 저렴한 인건비를 무기로요. 삼성전자는 한 해 만드는 스마트폰의 절반가량을 베트남에서 만듭니다.
약 1억5000만대에 달합니다. 스마트폰은 작은 PC입니다. 반도체를 비롯해 어마어마하게 많은 부품이 들어갑니다. 그럼 이건 다 베트남에서 만들까요. 아니지요. 베트남은 아직 그 정도로 실력이 올라오지 않았어요. 그럼 어디서 오나요. 한국에서 만들어 수출합니다.
스마트폰을 만들 때 들어가는 수많은 부품 중 상당수가 한국에서 건너갑니다. 베트남에는 삼성전자뿐 아니라 수많은 기업이 진출해 있어요. 기업 중 상당수가 이런 식으로 서플라이 시스템을 구축해놨습니다. 그러니 한국에서 베트남으로 수출하는 부품, 중간 기자재 규모가 어마어마한 거죠.
그러니 한국이 베트남을 상대로 엄청난 규모의 무역흑자를 볼 수 있는 겁니다. 반대로 베트남에서 만드는 수많은 완성품은 전 세계 곳곳으로 흘러갑니다. 삼성이 많드는 1억5000만대에 달하는 스마트폰이 한국 한 곳으로만 가는 건 아니겠지요.
미국·유럽·중국·아프리카까지 전 세계 곳곳으로 수출됩니다. 그 덕분에 삼성전자가 베트남 전체 수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20%가 넘습니다. 그러니까 베트남 입장에서 한국을 상대로 엄청난 규모의 무역적자를 보는 건 꼭 손해 보는 장사라고 할 수 없어요. 그냥 양국 간 경제 시스템을 봤을 때 필연적인 측면이 있는 거죠.
하지만 눈에 뻔히 보이는 30조원이 넘는 숫자가 속 쓰리게 보일 수도 있는 거죠. 이미 베트남 정부 고위 관계자 상당수가 이 같은 문제의식을 공유하고 있다고 합니다. 이날 발표에 나선 응우옌주이러이 베트남 세계경제정치연구원 부교수의 의견도 마찬가지입니다.
그의 발표 내용을 간략히 소개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2020년에 한·베트남 교역액은 1000억달러에 달할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베트남은 균형적인 방향으로 교역 촉진을 바란다. 베트남은 열대 농산물, 섬유·의류제품, 목재 제품, 고무 등 품목이 한국 시장 접근이 용이하기를 바란다. 경제 협력은 양국이 윈윈하는 구도가 되어야 성공한다. 양국 모두가 이익을 창출하는 방향이어야 한다.'
이날 발표에 나선 박태호 광장 국제통상연구원장(전 통상교섭본부장)도 마찬가지 의견이었습니다.
양국의 미래 비전이 수평적 협력, 전략적 파트너십 관계로 발전해야 한다는 거지요. 그런데 당장 한국이 베트남에서 공산품 등 수입을 늘리기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솔직히 말해 수입할 게 많지는 않지요.
그렇다면 역시 해법은 1·2차 산업에서 찾아야 합니다.
박 원장의 해법 중 하나는 베트남 식품, 과일 등을 상대로 한국이 통관 절차를 좀 낮추라는 것입니다. 베트남은 여전히 농산품 분야가 GDP의 15%를 차지할 정도로 비중이 높습니다. 하지만 여러 가지 이유로 수입 제한에 걸려 있는 품목이 많지요. 무턱대고 문턱을 낮추기는 힘들지만 전향적인 관점에서 생각해볼 여지가 많다는 얘기입니다.
아울러 양국이 공동으로 글로벌 시장에 프로젝트를 개척해 이익을 공유하자는 주장도 내걸었습니다. 예를 들어 북한 개발에도 공동으로 참여해 과실을 나누는 것도 대안이 될 수 있겠지요. 베트남 전문가로 불리는 허윤 서강대 국제대학원 교수도 같은 입장이었습니다. 그는 "농산물에 대한 무역장벽이 아직 높은 것이 현실"이라며 "라벨링, 인증 요건이 까다로워 어려운 측면이 있다"고 진단했습니다.
또 하나 집중해서 봐야 할 것은 부품 국산화에 나서달라는 베트남 정부의 요구입니다.
완제품에 들어가는 부품을 한국에서만 가져다 쓰지 말고 베트남 기업을 키워 공생하자는 것이지요.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베트남 방문 당시 응우옌쑤언푹 총리와 면담한 자리에서 나온 얘기에 이런 뒷배경이 숨어 있습니다.
푹 총리는 "삼성이 사업 규모와 범위를 계속 확대해 베트남을 세계에서 가장 큰 생산거점일 뿐만 아니라 세계에서 가장 큰 전략거점이 될 수 있도록 해달라"고 요청했습니다.
또 "베트남 기업이 삼성의 부품 공급망에 참여할 수 있는 조건 창출과 지원 산업 확대를 위해 계속 지원해주는 동시에 반도체 분야와 인프라스트럭처, 금융, 정보기술(IT) 개발에도 착수해달라"고 요청하기도 했지요.
이 부회장은 "베트남의 지원 산업 발전과 (부품) 국산화 비율 증가는 삼성의 바람이기도 하다"면서 "삼성은 베트남에 생산투자에만 집중하지 않고 연구개발을 촉진하고 있다.
인력, 부품 공급 분야에서 베트남 기업과 더 많이 협력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화답했습니다. 여러분들 생각은 어떠신가요. 베트남과 한국, 한국과 베트남이 장기적인 동반자가 되기 위해 앞으로 어떤 그림을 그려가야 할까요.
[하노이 드리머]
